쇼펜하우어의 행복론 (1)

2024. 5. 25. 00:05Philosophy

쇼펜하우어는 삶의 지혜를 가능한 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기술이라고 일컫는다. 

삶의 지혜가 곧 행복론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곧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국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인정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행복이냐는 명제는 의논해볼 가치가 있는 논쟁거리이지만, 인생의 부조리함과 무용함에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 솔직한 인간이라면 이 명제는 '전반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시 글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운명을 차이나게 하는 것을 세 가지 요소로 분류한다. 인간을 이루는 것(즉 인격이다), 인간이 지닌 것, 인간이 그리고 인간이 남에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저자는 첫 번째 요소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그 이유에 대해 비유를 통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우리는 시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좋은 시력을 갖고 있거나 심미적 감수성이 뛰어난 인간은 모나리자의 그림이나 아름다운 타인을 바라볼 때 남들보다 더 큰 감동을 느낄 것이 자명하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단적인 경우로 시력을 잃은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시각을 우리를 이루는 것으로, 모나리자의 그림을 행복감을 주는 대상으로 치환하여 생각한다면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다. 외부의 대상은 간접적인 것이고, 우리 마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인격 그 자체이다. 우리 삶의 외부에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동일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변주곡'에 비유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이루는 것들은 아무도 우리 자신에게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마저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인생을 이루는 요소를 나눈 세 가지 항목들은 상호 독립적인 요소들인가? 몇 가지 반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아는 세상의 한계, 혹은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한계는 우리의 어휘력이다'라고 썼다. 즉 우리가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 풍부한 감수성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어휘력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이다. 즉 어휘력이 풍부한 사람은 자신이 관찰하고 인식한 대상에게서 새로움을 찾아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유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쇼펜하우어 본인이 '상상력이 풍부한, 재기 있는 인간이 뛰어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주장했는데 이 상상력이 우리의 교육 수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본인의 주장처럼 우리가 물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경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른 하나의 예시를 들어보자. 인간의 무의식은 본인의 경험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무엇을 도전하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은 경험밖에 없는 인간, 그래서 누구를 대하든 구김이 없고 자신감에 넘쳐 유쾌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그리고 주변에 한두명씩 알고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세 번째 요소는 무의식 속에서 우리의 정신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새로움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항상 새로움만 추구할 수 없는 무료함이 가득한 우리 인생에서 행복하기 위해 우리의 내면적 정신력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도파민 공급원에 비해 우리의 인생은 매우 짧다고 할 수 있다. 아까 전의 비유로 돌아가 본다면, 왜 시력만 높이려고 하는가? 더 좋은 그림, 더 아름다운 대상을 관찰하고자 하는 의지는 과연 불필요한 것인가?

 

그러나 가벼움과 무거움의 극단에서 점점 더 가벼움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정신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쇼펜하우어의 조언은 새겨 들을 만하다. 그는 우리를 이루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태도는 '명랑함'이라는 사실의 자명함을 이야기한다. 명랑한 마음은 즉각 보상하기 때문이다. '많이 웃는 자는 행복하고, 많이 우는 자는 불행하다'라는 단순한 격언은 진부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명랑한 마음이 건강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강조하는데, 이를 위해 무절제와 방탕을 줄이고 운동과 식이요법 등을 통한 건강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행복에 대한 고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행복을 가로막는 요소들에 살펴보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이는 고통과 무료함인데, 이 두 가지 적수는 적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쪽에 예민하게 반응할수록 다른 한쪽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정신력이 약한 사람은 무언가에 몰입해 있지만 약한 정신력으로 인해 외부에서 새로운 것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이로 인해 공허를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외적인 자극을 갈망하게 되고, 낭비하고 비참한 상태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의 경우, 꺼림칙한 상상을 포함한 풍부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고통스럽다. 그들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안정되고 여유 있는 삶,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없는 삶, 즉 고독을 꿈꾼다. 이들은 강한 정신력 덕분에 단순한 인식만으로도 강렬한 관심을 보인다. 이들은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자신의 인생의 주제로 삼고 개인적 성향에 따라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다. 즉 인생의 무게중심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점이 드는데, 쇼펜하우어는 전적으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를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정신력의 강함을 좋고 나쁨의 척도로서 매기고 있다.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고통을 느끼는 감성이 극도로 예민하기에 곤혹스러운 감정을 자주 느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리고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가장 떨어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행복의 질, 행복의 종류에 대해 자신만의 견해가 있는 듯한데,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행복을 물리학적인, 생물학적인 작용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차이가 행복의 질을 결정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력을 척도로 삼아 분류한 쇼펜하우어의 관점이 본질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신력은 '인생을 얼마나 가볍거나 무겁게 살아가는가', 혹은 '무언가를 인식하거나 이에 반응할 때 얼마나 많은 이성이 관여하는가'와 같은 질문의 답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하나의 물리량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무겁게 사는 사람은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각각의 인생의 태도는 그 나름의 정수를 품고 있다. 마치 재즈와 고전주의 클래식의 차이와 같다고 느낀다.